“처음 살 때 무리해서라도 선택했어야 하는데….”
“옵션이 아닌 기본으로 장착돼야 옳은 것 아닌가요?”
최근 자동차 사이트 게시판에서 VDC(Vehicle Dynamic Control·차체 자세제어 장치)와 관련된 문답 중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한탄이다.
자동차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겐 생소하게 들릴 수 있는 VDC는 주로 현대자동차(이하 현대차)와 르노삼성에서 부르는 기술 명칭이지만, 미국과 유럽에선 ESP(Electronic Stability Program)라는 이름으로 통용된다. 나라와 자동차 메이커마다 명칭은 다르지만 작동원리는 거의 동일하다. 운전 도중 벌어지는 각종 위험상황에 대비해 여러 센서들이 보내오는 정보를 종합하여 차량의 자세를 제어하는 구실이 그것이다.
현재 브레이크 분야의 대세가 된 ABS 시스템이 급정거 시 바퀴 잠김을 방지하고 TCS가 미끄럼 방지를 주목적으로 한다면, VDC는 이 두 가지 기능에 차체 자세제어 기능을 더한 ‘업그레이드된 첨단 안전장치’로 각광받고 있다.
우리나라 자동차 소비자들 역시 안전에 대해 관심이 늘면서 ABS, SAB(사이드 커튼 에어백)는 물론 TCS, 나아가 VDC 옵션까지 고려하는 추세다. 하지만 막상 자동차를 구입할 때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고 만다. 엄청난 옵션가격 때문이다. VDC 장착 차량을 구입하려면 적게는 200만원에서부터 많게는 1000만원까지 옵션 가격을 더 내야 한다(표 참조).
사이드 커튼 에어백은 물론 VDC까지 장착
“우리나라의 경우 일부 고급 차종을 제외하면 거의 풀옵션을 택해야 VDC 장착이 가능한데, 그 옵션 가격에 거품이 끼여 있습니다.”
최근 가족 나들이용 중고차 구입을 고려하던 한의사 이우용(33) 씨는 안전한 자동차 구입을 위해 VDC와 사이드 커튼 에어백을 장착한 차량을 찾다가 결국 포기했다. 출시된 지 1~2년 된 중고차 가운데 이런 안전장치를 갖춘 차량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수백만원이나 비싼 고급 옵션 차량에만 안전장치가 장착돼 있어 채택률이 떨어지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안전장치만 선택적으로 고를 수 없게 만들어진 불합리한 옵션 정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별나게 고급 차량에만 한정된 옵션 품목으로 알려졌지만, 근래 VDC를 기본 안전장치로 탑재하는 자동차 회사들이 늘고 있다. 눈길 교통사고가 많은 북미나 북유럽의 대다수 국가는 물론, 차체가 높아 위험도가 높은 RV 차량의 경우 지역을 가리지 않고 기본 기능으로 인식되고 있다. 심지어 이륜차에까지 적용될 정도다.
이 기능이 최근 주목받게 된 계기는 한 자동차 회사가 실시한 ‘VDC 실험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부터다. 동영상에는 시속 70km로 주행하던 자동차가 갑자기 나타난 빗길 위에서 운전자가 좌우로 핸들을 돌릴 경우 일반 차량은 한 바퀴를 돌 정도로 차체가 균형을 잃은 반면, VDC 장착 차량은 안전하게 빗길을 통과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VDC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각종 조사보고서도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4월1일 보험개발원 부설 자동차기술연구소는 고속으로 주행할 때 ESC를 장착하면 사망사고 위험이 43% 감소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연구소의 연구 결과도 “VDC를 장착하면 단독사고의 경우 사망사고 위험이 무려 56%나 감소하고 다중사고는 32% 줄어든다”는 결론을 내렸다.
VDC에 필적할 만한 또 다른 첨단 안전장치는 사이드 커튼 에어백이다. 이 에어백은 정면충돌 때 운전석과 조수석 승객을 보호하던 초기 수준에서 벗어나 측면사고와 차량전복 사고에서 승객을 보호한다.
미국시장에 출시되는 자동차는 2009년 가을부터 승객의 머리를 보호하는 사이드 커튼 에어백을 의무적으로 장착해야 한다. 2005년 미국의 교통사고 가운데 측면 충격으로 약 65만명이 부상하고 9200여 명이 숨진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9월 세계적인 경제잡지 ‘포브스’는 미국에서 시판되는 가장 안전한 패밀리카로 15개 모델을 선정했다. 이 가운데 현대·기아차가 무려 네 종류나 포함됐다. 이 조사는 차체 구조의 안전도와 함께 정면충돌 시험 때의 앞좌석 전면 에어백, 측면충돌 실험 때의 앞좌석 측면 사이드 커튼 에어백, 후면충돌 시험 때의 ‘액티브 헤드레스트(머리받침)’의 기능을 토대로 선정됐다. 한국 언론도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한국 자동차의 안전도 상승 소식을 기뻐했다.
그러나 정작 이 뉴스에 반색할 사람은 미국 소비자들이지 한국 소비자들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팔리는 거의 모든 차량이 VDC나 사이드 커튼 에어백 등을 기본 안전사양으로 하고 있어 이 차량들을 구입하는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국 소비자가 조수석 에어백이나 사이드 커튼 에어백을 구입하려 해도 기본형 차량에는 선택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태반이다. 조수석 에어백만 추가하고 싶어도 4~6단계 등급 가운데 최고급형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차의 경우 미국에 수출하는 모델이라면 베르나 같은 최저가 차량에까지도 운전석 및 조수석 에어백은 물론 사이드 커튼 에어백, ABS 시스템이 기본적으로 장착돼 있다. 한국 소비자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더 큰 문제는 자동차 메이커들이 국민 안전을 볼모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가 100여만원 … 기본가 대비 30% 이상 더 지불
이 같은 국내 자동차업계의 옵션 끼워팔기는 얼마나 심각한 수준일까. 먼저 주요 포인트로, 고급차의 조건으로까지 격상된 VDC와 사이드 커튼 에어백의 가격을 짚어봐야 한다.
현재 자동차 옵션의 정확한 가격을 단언하기는 간단치 않다. 수십여 개 옵션이 ‘디럭스’ ‘프리미엄’ ‘럭셔리’ 등의 이름으로 패키지화됨으로써 소비자가 특정 장치들의 가격을 짐작하기 어렵게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차종의 특정 트림(모델명)에서 안전장치 단독 선택이 가능한 경우도 있어 대략 120만원(VDC 약 60만원+사이드 커튼 에어백 60만원)으로 유추할 수 있다(자동차 전문가들은 실제 가격은 이보다 한참 낮다고 귀띔한다).
이는 차량 가격에 비하면 약 2.6%(에쿠스)에서 10.7%(아반떼)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하지만 막상 소비자가 두 장치를 선택하려면 차량 가격의 18%(에쿠스, 약 800만원)에서 51%(아반떼, 약 570만원)를 더 내야 한다. 소나타와 베라크루즈 역시 기본가 대비 30% 이상을 요구한다. 이는 원가가 100만원에 불과한 안전장치를 볼모로 소비자가 원하지 않는 과도한 지출을 유도하는 셈이다. 특히 아반떼를 제외한 전 차종에서 수동변속기 차량에는 위의 두 가지 안전장치를 장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드러났다.
국내 자동차시장의 70%를 차지하는 현대차의 ‘우스꽝스러운’ 판매방식은 투스카니에서 절정을 이룬다. VDC를 선택하려면 ‘프리미엄 사운드 팩’, 즉 고급 오디오를 추가로 구입해야 한다. 사이드 커튼 에어백은 한술 더 떠 배기량 2700cc에 내장을 붉은색으로 할 것(레드 팩)을 강요한다.
이에 대해 투스카니를 구매하려 했던 한 소비자는 현대차 홈페이지에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현대차는 “판매방식 외의 사양은 선택이 불가하고 왜 그런지는 공개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고 했다. 국내 자동차시장을 과점한 기업의 위세가 느껴지는 답변이다.
이러한 지적들에 대해 현대차는 공식 대응을 꺼리고 있다. 하지만 안전을 볼모로 한 과도한 옵션이라는 지적에는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먼저 차종과 트림에 따라 독립적으로 선택할 여지가 늘고있고, 첨단기술일수록 고급 차량에서 시작해 소형차로 옮겨가는 점을 고려하면 아직은 과도기라는 것. 문제는 모든 사양을 독립적으로 선택하게 할 경우 상당한 가격인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현대차의 옵션 끼워팔기 행태에 대해 대다수 전문가들은 매우 비판적이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자동차 메이커들의 ‘옵션 장난질’이 도를 넘었다는 것. ‘자동차 10년 타기 운동본부’ 임기상 대표는 “자동차의 기본 안전장치를 고급 옵션의 일부인 것처럼 포장해 마케팅에 활용하는 국내 자동차업체들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지적한다. 대림대 자동차공학과 김필수 교수의 반응은 좀더 극단적이다.
“VDC나 에어백은 자동차 개발이나 생산비와 무관한 기술로 원가절감을 통해 수십만원이면 장착이 가능하다. 소비자 생명과 직결된 장치임을 고려할 때 이 같은 판매 행태는 자동차 생산 세계 5위로까지 키워준 국민에 대한 배신일 수 있다.”
안전장치 따로 선택 가능 의무화 방안 필요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자동차업체들의 옵션 끼워팔기 관행의 정점에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현대·기아차가 자리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에 대한 문제는 언론 등을 통해 여러 번 제기된 바 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선진적인 방식은 VDC와 사이드 커튼 에어백 장착을 의무화하는 것. 하지만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차량 기본 가격이 상승하기 때문에 자동차회사들이 꺼릴 뿐 아니라 정부의 의지도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건설교통부(이하 건교부) 자동차팀 박정규 안전기준제도담당관은 “현재 우리나라 자동차 안전기준은 국제기준을 충족하고 있다”면서 “소비자 부담을 가중하는 고급 안전장치(VDC, 사이드 커튼 에어백 등)의 안전기준 포함 여부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과거 유아 카시트 의무화 법안이나 급발진을 막기 위한 시프트락에 대해서도 건교부는 미온적 태도를 보인 전력이 있다.
이 때문에 자동차 전문가들은 현실적인 대안으로 어떤 트림에서도 안전장치는 따로 선택할 수 있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을 내놓는다. 그 다음으로는 사양을 성격에 따라 패키지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공조 패키지, 안전 패키지, 내장 패키지, 외장 패키지, 오디오 패키지 등으로 세분한다는 것. 하지만 이마저도 ‘풀옵션=고급차’로 생각하는 소비자가 많은 세태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한 자동차 전문가는 다음의 말로 국내 자동차 메이커들을 비판했다.
“벤츠는 안전과 관련된 기술은 특허를 출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볼보는 차 안에 내비게이션을 가장 늦게 장착한 회사인데, 그 이유는 안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철두철미하게 연구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특히 현대차의 방식은 한마디로 천박하다. 장사를 하려면 똑바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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